영명사
본문
한자1
[興輪寺]
한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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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설명)
1)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에 있는 사찰. 1926년 인근에서 주막을 운영하며 살던 이명렬이 자신에게 아들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부처님께 귀의하는 의미로 사찰을 세웠다. 사찰을 세운 이는 아들을 얻지 못했으나 그의 신심과 발원으로 세운 영명사는 득남기도처로 유명하다. 인법당(因法堂) 형태의 작은 법당과 요사채 2동으로 구성된 단출한 규모이다. 1935년에 법당을 중수하였고, 30여 년 뒤인 1996년 아미타부처를 모시고, 관음과 지장을 좌우 협시 보살로 모셨다. 이때 법당 안에 모셔져 있던 목조 삼존불상은 손상이 심해 현재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목아박물관으로 이운했다. 2) 평안남도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금수산(錦繡山)에 있던 사찰이다. 392년(광개토왕 2)에 아도(阿道)화상이 칙령을 받들어 창건하였는데, 고구려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 옛터에 있다고 하여 영명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선종(宣宗)숙종(肅宗)예종(睿宗)인종(仁宗)의종(毅宗) 등이 행차하였다. 1109년(예종 4) 4월에 영명사에 문두루 도량을 개설하였으며, 5월에 추밀원사 허경(許慶)에게 칙령을 내려 기린굴(麒麟窟) 위에 있던 영명사를 아래로 이전하고, 부벽루(浮碧樓)를 고쳐 영명사의 전당으로 삼게 하였다. 1663년(현종 4)에 자평(自平)이 전당과 요사, 1703년(숙종 29)에 구관(句管)이 득월루(得月樓)를 중수하고, 1846년(헌종 12)에 홍재철(洪在喆)이 중수하였으나, 1894년(고종 31)에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전소(全燒)되었다. 1911년에 16개소의 말사를 거느린 평안남도의 본산이 되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전소되어 흔적이 없어졌고, 현재에는 부벽루와 팔각오층석탑, 만경대 구역의 부속 암자인 법운암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