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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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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설명)
1)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만월산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1670년(현종 11)을 전후한 시기에 왕장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2)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에 있던 사찰이다. 3) 충청남도 부여군 남당진 북쪽에 있던 사찰이다. 4)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에 있던 사찰이다. 5) 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던 사찰이다. 6)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에 있는 사찰. 신라시대 914년(신덕왕 3)에 보양화상(寶壤和尙)이 창건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천일(天日)이 중건하였다. 1458년(세조 4)에 해인사 대장경을 50부 인출하여 전국의 사찰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용연사에도 1부가 보관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탄옥(坦玉)경천(敬天) 등에게 명하여 중창하도록 하였다. 1621년(광해군 13)에 범종각을 건립하였는데, 1650년(효종 1)에 불이 나서 법당과 요사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다음 해 계환(戒環)여휘(麗輝) 등이 설선당(說禪堂)과 심검당(尋劍堂)을 건립하였고, 그다음 해에는 일언(一彦)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건립하였다. 1653년에는 홍묵(弘默)이 대웅전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건립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건립하였다. 1655년에는 희감(熙鑑)과 홍묵이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를 건립하였고, 다음 해에는 청진(淸振)이 관음전을 건립하였다. 1657년에는 계홍(戒弘)이 반상료(返常寮)를, 1658년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을, 1659년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을 건립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1661년에는 계홍이 두월료(斗月寮)를 건립하였다. 1668년에는 대종(大鐘)과 금구(金口)를 조성하였으며, 1670년에는 천왕문 앞의 석교가 완성되었고, 1672년에는 법고(法鼓)를 완성하였다. 1673년에는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건립하였다. 1674년에는 부도암을, 1675년(숙종 1)에는 사리각(舍利閣)을 건립하였으며, 또 용문교와 법당의 중종(中鐘)을 차례로 완성하였다. 1682년에 천왕문을, 1688년에 응진전(應眞殿)과 16나한상을 조성하였으며, 1693년에 영류당(咏流堂)을, 1695년에는 일주문을 건립하였고, 1711년에 시왕탱(十王幀)을 봉안하고 명부전을 단청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찬화(粲和)에 의해 대웅전과 종각이 중수되었다. 당시 거주하는 승려가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사찰이었다. 1726년(영조 2)에 대웅전과 동서 별실, 좌우 승당이 다시 불탔으나, 1728년 혜조(惠照)와 찬화가 중건하였다. 용연사에 있는 석가여래비에 1613년(광해군 5)에 계단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지금의 금강계단(金剛戒壇)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 부처님 사리를 청진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옮길 때 용연사 승려들이 그 일부를 이곳에 모셔 와 계단에 사리를 모셨다. 또한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에서는 복장 후령통, 조성발원문, 복장 전적 등이 발견되었다. 조성발원문에는 1655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시기, 봉안 사찰,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기록되어 있어 17세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산내 암자로는 은적암(隱寂庵)명적암(明寂庵)광선암(廣仙庵)이 있다. 7) 황해북도 개성시 사천(沙川)에 있던 사찰이다. 8) 함경북도 부령군의 부령에서 동으로 65리 되는 곳에 있던 사찰이다. 9) 평안북도 초산에서 남으로 150리(약 58km) 되는 곳에 있던 사찰이다. 10) 중국의 사천성 성도부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 연대 미상. 혹은 한나라(漢) 때 창건이라 한다. 동진 399년(융안 3) 혜원의 동생 혜지(慧持)가 본사에 들어가 포교를 시작하니 혜엄(慧嚴)승공(僧恭) 등을 비롯하여 많은 승(僧)속(俗)이 모였다. 후에 422년(의희 18) 혜지가 이 절에서 입적한다. 이로부터 촉의 지역에서 유명한 사찰이 되었다. 대대로 명승이 있어서 경전을 강설하고, 불교를 선포하였다. 남북조(南北朝)경에는 담빙(曇憑)이 있으면서 독경하는 아름다운 소리가 현저했고, 양나라 때에는 혜소(慧韶)가 이곳에서 불교를 융성시켰다. 수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도 초청을 받고, 이 절에 3년 동안 있었다. 당나라 때에는 공혜사(空慧寺)라 개칭하고, 후에 다시 용연사라 하였다. 송나라의 대중상부 연간(1008~1016)에 성수사(聖壽寺)라 개명하였다. 절 안에 진태수(秦太守)가 돌로 만든 물소가 있으므로 석우사(石牛寺)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