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사
본문
한자1
[香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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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설명)
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부아산(현 삼각산)에 있던 사찰이다. 고려 1010년(현종 원년) 거란의 침입으로 한때 태조의 재궁을 향림사에 이안한 일이 있었는데, 고려 1016년(동왕 7) 정월에 다시 헌릉으로 모시게 되었다. 2) 충청남도 부여군 천등산에 있던 사찰이다. 3) 전라남도 순천시 석현동 비봉산에 있는 사찰이다. 대웅전에 보관된 「향림사대웅전중수기(香林寺大雄殿重修記)」에 따르면 통일신라 865년(경문왕 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고, 조선 1669년(현종 10)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1618년(광해군 10) 지봉 이수광이 편찬한 『승평지(昇平志)』 사찰조를 보면 “향림사는 순천의 북 5리에 있으며 겨울이면 동백이 무성했다. 갑신년에 순천 사람들이 공동으로 재력을 모아 중창하였는데 산세의 맥을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승평지』를 편찬한 연대가 1618년이므로 위의 갑신년은 1604년(선조 37)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폐허가 된 사찰을 서둘러 복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림사가 위치한 곳은 풍수지리상 나는 새가 알을 품고 있다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으로 용의 정기가 한꺼번에 모여 지세가 강하다고 한다. 따라서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사찰을 짓고 불상과 탑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사찰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대웅전과 요사채 등 다섯 동의 건물이 있고 3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기가 있다. 이 석탑은 두 기 모두 단층 기단으로 옥개석의 층급 받침이나 물 흐르는 면의 평박한 수법, 상륜부의 노반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 말인 9세기경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과 유물이 없는 점을 고려한다면 향림사에서 가장 연대가 거슬러 가는 유물은 이 석탑이다.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4) 1792년(정조 16) 쾌명(快明)이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향림산(香林山)에 창건한 사찰이다.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될 때는 귀주사(歸州寺)의 말사였으며, 옥수암(玉水庵)이라고도 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산 밑에 사는 김진성(金振聲)은 산 위에서 일을 하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으나 얻을 수 없었다. 바위 하나를 밀치고 보았더니 그곳에서 샘이 솟아났으므로 샘의 이름을 옥수(玉水)라 하였다. 이 일을 겪은 김진성은 쾌명을 초빙하여 사찰 창건의 뜻을 밝히자, 윤덕구(尹德久)의 아들 칠성(七星)과 김정응(金正鷹)박현철(朴賢喆)함필흥(咸必興) 등이 시주를 얻어 창건하고, 사찰 이름을 옥수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원 지역에 한발이 심할 때 사찰 앞에 있는 큰 바위에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