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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본문

한자1
[禾巖寺]
한자2
뜻(설명)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있는 사찰. 신라시대 769년(혜공왕 5) 진표율사(眞表律使)가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 이 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특히 『화엄경』을 강설해 많은 중생을 제도했던 이유로 화엄사라 이름을 붙였다. 또한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고려 941년(태조 24) 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태종 1)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사찰에 화재가 나서 2년 뒤 중건하고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하면서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했으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 다시 원래 사찰 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에 의한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다시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도한(華城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사찰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때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春潭)이 중심이 되어 중건하였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잇따른 화재로 인한 사찰의 피해가 막심한 것을 염두에 두고 풍수지리에 근거해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 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耔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 축성(竺星)이 중수했으며, 1909년 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 화암사라고 개칭하였는데 3년 뒤에 화재가 나서 중건, 이후 625전쟁 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후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 중창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조가 사찰에 모셨던 관음보살상 6첩 서병과 진표의 진영을 비롯한 16점의 진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해방 후 사라졌고, 절 현판과 탱화 등도 도난당했다. 현재 진표율사 창건 당시 짓고, 1401년 개축한 부속 암자 미타암과 죽암당 부도를 비롯한 1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