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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본문

한자1
[滿空]
한자2
뜻(설명)
(1871~1946)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의 선맥을 이어받아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에서 선풍을 떨친 근대의 대선사이면서 조국의 광복에 헌신한 독립 운동가이다. 만공은 법호이고 휘가 월면(月面)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속성은 송(宋)씨, 본명은 도암(道岩)이다. 전북 태인의 상일리,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1871년(고종 8) 음력 3월 7일 태어났다. 1883년(고종 20) 13세 때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 과세(過歲) 올리러 갔다가 불상을 보고 신심을 일으켜 출가를 결심한다. 공주군 동학사에 입산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고, 1884년(고종 20년) 14세 12월 8일, 경허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성원(泰虛性圓)을 은사로,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였다. 이곳에서 10여 년간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의 화두(話頭)를 잡고 선의 진수를 성우에게서 배웠다. 다시 온양의 봉곡사(鳳谷寺)로 옮겨 노전을 맡아 보면서 정진했는데, 1895년(고종 32) 7월 25일 동쪽 벽에 기대어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하고 일원상이 나타나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 동정일여(動靜一如)하였다. 다음 날 새벽 종송을 치다가 『화엄경(華嚴經)』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의 각림보살(覺林菩薩) 게송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구절을 통해 문득 법계성을 깨달았다. 그 후 공주 마곡사 보경(普鏡)의 토굴에서 3년간 정진하던 중 성우로부터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간택 받는다. 1898년 7월에 서산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로 성우를 찾아가 다시 선리를 지도받고, 3년 뒤 동래 범어사 계명암(雞鳴庵) 선원 조실 초빙에 응하는 성우를 모시고 함께 가서 여름 안거를 마치고, 통도사 백운암(白雲庵)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새벽 종소리를 듣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이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던 중 1904년(광무 7년) 7월 15일 스승 경허화상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아 법맥을 이었다. ‘경허(75대)-만공(76대)-혜암(77대)-묘봉(78대)’으로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니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경허는 불조 혜명이 끊어지지 않도록 당부하고 함경북도 갑산으로 떠났다. 만공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1905년 2월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초암(草庵) 금선대(金仙臺)를 창건하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하며 보임한다. 수행 대중이 늘어나자 수덕사(修德寺),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와 마하연(摩訶衍)에서 3년을 보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창건하였다. 1921년 11월 30일 설립된 선학원 중앙선원 설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1927년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을 지었는데,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하여 임제종풍(臨濟宗風)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1937년 2월 마곡사(麻谷寺) 주지를 지낼 때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총독부가 일본의 대처불교에 따를 것을 종용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만공은 당시 회의석상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에게 “한일합방 뒤 사찰령과 사법(寺法)을 시행한,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말로는 독실한 불자라고 하나 일본 승려의 파계 경향을 조선 승려들에게도 종용하였으니, 조선불교를 파계시킨 책임이 당국에 있다. 경전에 비구를 파계시키면 삼아승지겁 동안 아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으니 우리가 그를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며 오히려 그의 명복을 빌어주자고 비판 힐난하였다. 만공은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념(無念)과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스스로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여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無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참선을 위해서는 수행자 개인의 노력과 자세도 중요하지만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하기에 적절한 도량, 함께 수행하는 좋은 도반(道伴) 등의 세 가지 환경적 요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수행 활동으로는 존재의 본체를 마음, 자성(自性), 불성(佛性), 여여불(如如佛), 허공, 주인공,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심(自心), 일원상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개인의 참된 본질이 우주 만물의 본체와 하나라고 보았다. 만공에 의하면 불교의 진수는 인간이 스스로 마음을 깨닫는 데 있으며, 인간의 가치 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그는 수행을 통하여 차별이나 분별의 관념에서 벗어나면 편벽됨이 없이 두루 자유롭게 지혜와 자비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며, 이때의 그가 바로 부처이며 스승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유와 자비를 구하는 수행법으로는 참선을 으뜸으로 보았다. 수도승들에 대한 지도방법으로 침묵 또는 방(棒), 할(喝), 격외(格外)의 대화와 일원상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생애 후반인 1940년 5월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 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덕숭산 상봉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자적(自適)하던 중 간월암에서 3년 동안 조국 광복 기도를 봉행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 3일 전에 회향하고 광복일날 무궁화 가지를 꺾어서 쓴 세계일화(世界一華)의 명구는 유명한 일화이다. 1946년 10월 20일, 전월사에서 목욕하고 장삼에 가사를 수하고 단정히 앉아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가왔네.”라고 말하고 잠들 듯이 열반에 드니, 세수 75세, 법랍 62세였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영골을 만공탑에 모시고 스님의 진영을 경허화상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사후에 『만공어록(滿空語錄)』이 편찬되었다. 문하에는 보월(寶月), 전강(田岡),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금오(金烏), 춘성(春城), 벽초(碧超) 등의 비구가 있으며,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 등의 비구니 제자도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