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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본문

한자1
[白連寺]
한자2
뜻(설명)
1)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고려산(高麗山)에 있는 사찰. 고구려 416년(장수왕 4)에 인도 승려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창건 뒤의 역사는 알려지지 않으며, 현존 자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806년(순조 6)에 세운 의해당(義海堂)의 사리비와 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1881년(고종 18)에 벽담이 화주가 되어 현왕도를 조성하고, 1888년(고종 25)에도 지장보살도와 신중도, 칠성도, 독성도 등의 불화들을 조성하여 법당에 봉안하였다. 1905년(순종 6)에 인암(忍庵)과 박보월(朴寶月)이 중창했으며, 1908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탱화를 봉안하였다. 사찰명과 관련하여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도의 한 승려가 우리나라에 사찰을 지을 터전을 물색하다가 강화의 고려산에 이르렀는데, 연못에 다섯 색깔의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연꽃들을 공중으로 날려 떨어지는 곳마다 사찰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흰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세운 사찰이 백련사이다. 2)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향수산(香秀山)에 있는 사찰. 백련사는 신라 801년(애장왕 2)에 신응선사(愼應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용인시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석담대사가 작성한 백련사의 『약사』에 따르면, 고려 말 1389년(공양왕 1)에 중수되었으며, 1404년(태종 4)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하여 18개의 나한상을 조성하였다. 1671년(현종 12)에도 중수가 있었는데, 그 후 화재로 일부 소실되어 법당을 수리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가 1791년(정조 15)에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3)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감악산(紺岳山)에 있는 사찰. 신라 662년(문무왕 2) 의상(義湘)이 백련지(白蓮池) 동쪽에 백련암(白蓮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창건했으나, 창건 후 30년이 지난 692년(효소왕 1)에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되었고, 819년(헌덕왕 11)에 승려 무착(無着)이 옛터에 중창하였다. 이후의 역사는 조선 1588년(선조 21년)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작성한 『치악산백련사중창기문』에 자세히 전한다. 1008~1016년 사이에 이 자리에 연화암(蓮花庵)이라는 초가가 있었으며, 1116년(예종 11) 하의(荷衣)라는 도인이 이 초가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1358년(공민왕 7) 혜근(惠勤)이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창건한 뒤에 바로 이곳에 찾아와 사찰을 중수하였다. 1552년(명종 7)에는 학륜(學輪)이 이 절에 머물렀으며, 1570년대 초반 벽운(碧雲)과 조당(祖唐)이 윤한필(尹漢弼)과 김유량(金有亮)의 협력으로 중창하고, 1577년(선조 10)에 자운(慈雲)이 중수하였으며, 1587년에는 벽운이 다시 중수하였다. 1798년(정조 11)에 처봉(處峰)이 중수하면서 산의 이름을 감악산으로 바꾸고 사찰명도 산의 지명에 따라 감악사라고 하였다. 1910년 유일(有一)이 중수하였으나 1916년 화재로 소실되고, 훗날에 윤인선(尹仁善)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사찰명을 백련사로 바꾸었다. 1947년 태순이 중수하였고, 1950년 6·25전쟁으로 파손된 것을 195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1976년 수해로 대웅전이 무너졌고, 이듬해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돌로 축대를 쌓았으며, 1979년 일운이 중창불사를 진행하였다. 이후 1995년 중수하여 오늘의 모습에 이른다. 한때는 산내 암자로 미륵사와 신흥사, 천수암, 은적암, 청련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4)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지리산에 있는 사찰. 문화재로 남원 백련사육조대사법보단경(南原 白蓮寺六祖大師法寶壇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남원 백련사선종영가집언해(南原 白蓮寺禪宗永嘉集諺解,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순창 일광사목조관음보살좌상(淳昌 日廣寺木造觀音菩薩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고창 선운사대웅보전신중도(高敞 禪雲寺大雄寶殿神衆圖,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고창 선운사석상암산신도(高敞 禪雲寺石床庵山神圖,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고창 선운사석상암칠성도(高敞 禪雲寺石床庵七星圖,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5)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사찰. 신라 신문왕 때 승려 백련이 초암을 짓고 수행을 하던 중에 그 자리에 흰 연꽃이 솟아 나와 사찰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의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00년(광무 4)에 당시 무주부사였던 이하섭이 중수하였고, 이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상태에서 1961년에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1968년에는 요사를 건립하였다. 중창의 과정에서 백련암이라는 사찰명을 백련사로 바꾸었다. 6)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있는 사찰. 산의 지명에 따라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승려 무염(無染)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사찰명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만덕사로 불렀다. 근래에 본래의 이름으로 복원하여 백련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원묘국사 요세(了世)에 의해 사찰의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쇠퇴하였다. 당시 남해안 일대는 곡창지대로서 왜구들에 의해 약탈을 당하던 지역이라서 사찰은 폐사될 위기에 이르러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에 의해 본격적으로 중수되면서 예전의 사세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는 효령대군의 도움으로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진행되었다. 세종의 형이었던 효령대군은 당시 전국을 유람하던 도중에 강진 백련사에서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다시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7)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에 있는 사찰. 주변에 수미정사와 현통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