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금동약사여래입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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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芬皇寺金銅藥師如來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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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설명)
보물. 높이 3.45m. 소재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구황동)이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1800년대 조성된 분황사 보광전(寶光殿)에 봉안되어 있다. 높이 3.4m의 대형 불상으로 조선 후기 작품으로는 유일하며 규모가 가장 큰 금동불 입상이다. 1998년 3월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과정 중 발견된 「분황사상량기(芬皇寺上樑記, 1616)」와 「부동명활성하분황사중창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의 묵서(墨書, 1680)에 의하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이 약사여래 입상은 1609년(광해군 1) 5,360근의 동을 모아 제작한 불상이라고 한다. 조성 이후 김수홍(金壽弘, 1626~1690)의 『퇴우당집(退憂堂集)』, 임필대(任必大, 1709~1773)의 『유동도록(遊東都錄)』 등 조선 후기의 문집에도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정황이 명확해 보인다. 분황사에는 원래 755년(경덕왕 14) 봉안한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座像)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분황사는 신라시대부터 여러 고승들의 수행처이자 중요한 가람터로 인정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이다. 원래 이곳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불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지만,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약사도량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란 후 얼마 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장대한 규모의 복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규모가 커서 우람한 형태미와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어깨가 왜소해 전반적으로 동안(童顔)인 형태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이목구비에서는 16세기 불상 양식을 볼 수 있고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 엿보이는데, 신·구 양식이 공존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대형 불상이 대부분 소조(塑造, 진흙)로 조성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분황사의 금동 불상은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이 불상은 17세기 초반의 동조(銅造) 불상이라는 점, 앞 시기 규범에 따라 입상으로 조성되어 정통성을 담고 있다는 점, 높이 3.45m에 이르는 현존 최대 금동 약사불이라는 점 등의 이유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