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즉상입
본문
한자1
[相卽相入]
한자2
ⓢ
ⓟ
ⓣ
뜻(설명)
『화엄경(華嚴經)』에서는 10가지 걸림 없는 무애(無礙)의 표현으로 상즉무애(相卽無礙)와 상입무애(相入無礙)를 상즉상입(相卽相入) 상즉상용(相卽相容)이라고도 한다. 화엄종의 4법계설(四法界說)과 십현문(十玄門)의 각각 요소에서 삼라만상의 만법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융합해 작용하며 상호일치하고 타자에 서로 포섭되어 들어가면서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상즉이란 모든 현상의 본체에 대해 한쪽이 공(空)이면 다른 쪽은 반드시 유(有)이므로 동시에 공이나 유(有)가 될 수 없는 까닭에 양자가 서로 융합하고 일체화되어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개체가 없으면 전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공의 입장에서 저절로 전체는 없어지고 다른 개체에 일체화되어 버린다. 동시에 개체적 유의 입장에서는 다른 개체는 저절로 전체에 섭수되고 융화되어 일체화된다. 따라서 전체가 바로 개체[一切卽一]이다. 반대로 개체가 공, 전체가 유라면 동일 의미에서 개체가 바로 전체이다[一卽一切]. 이런 관계를 상즉이라 한다. 상즉무애(相卽無礙)는 하나의 연꽃잎은 반드시 자기를 버리고 상대와 같아지니, 바탕 전체가 일체 모든 법이면서 항상 상대를 거두어 자기와 같아지는 것이니 일체 모든 법이 곧 자기의 바탕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곧 상대이므로 자기를 세우지 않으며, 상대가 곧 자기인지라 상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자기가 존재하고 사라짐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서로 즉(卽)하여 통하니 걸림이 없는 상즉무애는 집착하는 나를 버리고 상대와 같아지므로 일체가 곧 나의 바탕이 되는 것이니 서로가 걸림이 없는 상즉무애이다. 상입이란 모든 현상은 연(緣)의 작용이 있어 존재하며, 그의 작용은 한쪽이 유력(有力)하면 다른 쪽은 무력(無力)해서 동시에 양쪽이 유력하거나 무력할 수 없어 양자가 항상 서로의 작용에 대립하지 않고 화합(和合)하는 것이다. 즉 연(緣)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은 각각의 연이 나름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연들이 모여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연 속에서 하나의 연이 빠지더라도 현상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일체 연은 쓸데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의 작용은 개체[一]가 유력해서 전체[多]를 잘 용납하기도 하고, 전체가 무력해서 개체에 잠입하기도 하므로 전체가 바로 개체[多卽一]인 것이다. 또 반대로 개체를 무력(無力), 전체를 유력이라고 보면 개체가 바로 전체[一卽多]인 것이다. 이런 관계를 상입이라 한다. 상입무애(相入無礙)는 하나의 연꽃잎이 펼쳐지면 일체 모든 차별법 가운데에 두루 들어가면서 다시 그 일체법을 거두어 자기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법을 펼치는 자리에서 항상 거둠이 동시여서 서로 걸림이 없는 것이다. 곧 지혜의 성품이 펼쳐지면 세상 모든 분별의 차별성에 두루 들어가면서 다시 그 모두를 거두어 자기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어 서로가 걸림이 없이 상입무애이다. 무애에서 표현하는 하나의 연꽃은 진리의 이치와 그 쓰임, 곧 불성(佛性)의 작용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즉과 상입의 관계는 체와 용으로 구별되는데, 용으로 작용하지 않는 체는 없으므로 체를 용의 입장에서 보면 상입뿐이며, 용은 체의 기능이므로 용을 체의 입장에서 보면 상즉뿐이다. 화엄교학의 중중무진의 법계연기에 의하면 이 현상세계(現象世界)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 현신(顯身)한 것으로 법계라고 한다. 그리고 법계는 한 티끌 속에 세계 전체가 반영되어 있으며, 일순간 속에 영원이 포함된 구조가 있다고 한다. 화엄교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법계연기설은 십현문(十玄門)과 육상원융(六相圓融) 등의 교설로 강설되며 화엄교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십현연기무애법문(十玄緣起無礙法門)은 화엄일승십현문(華嚴一乘十玄門)이라고 한다. 4법계 중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연기설을 강설하는 데 사용되는 교의로 화엄교학은 법계의 실상을 밝히는 방편으로서의 십현문을 중요하게 사용한다. 각 문의 특징은 상호 작용함에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개별적 낱낱 현상이 타자와 서로 일치하는 상즉(相卽)의 도리와 서로 타자에게 들어가도 장애가 되지 않는 상입(相入)의 도리가 결합하여 십현문의 극치를 나타낸다. 십현문은 차제 설법이 아니다. 하나의 문에만 들어가도 불교 최고의 깨달음 경지인 사사무애의 경지를 완전히 이룬 것이 된다.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은 십현문의 총설(總說)로서, 동시(同時)란 전후의 시간적 차별이 없음을 말하고, 구족(俱足)이란 진리를 드러냄에 남기거나 빠짐이 없이 다 갖추었다는 뜻이며, 상응(相應)이란 서로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우주 속에 있는 한량없는 사물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일체(一體)의 연기관계에 있다. 그리고 시간 개념을 적용했을 때, 제각기 한 법 위에 모든 법을 갖추고서도 앞과 뒤, 처음과 나중의 차별이 분명하여 서로 섞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현담(玄談)에는 마치 한 방울의 바닷물에는 그곳으로 흘러들어오는 모든 물줄기의 맛과 10종의 덕과 이익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법만 따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이 그 하나의 법에 포섭된다.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천차만별이지만 시간과 공간의 무변 속에서 동시에 상응하고 동시에 원만한 도리를 갖추며 연기의 도리에 따라 성립되어 하나가 일체에 상응하고 일체가 하나에 상응하여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무한 법계에서 일체 사물은 사(事)와 이(理)를 동시에 포섭한다는 상호 연관의 이론이다.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서는 “일체 끝없는 법문이 모두 하나의 법 도량에 있다.”라고 표현한다.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에서는 만상을 일(一)과 다(多)로 나누고 그 사이에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섭입(攝入)하여도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개개의 자신은 서로 차별한 상모(相貌)를 잃지 않으며 그 본성을 가진다. 현상의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一) 속에 다(多)가 있고 다(多) 속에 일(一)이 있다는 상입설(相入說)과 통한다. 곧 일(一)에 다(多)를 갖추고 다(多)는 일(一)을 포용하여 일(一)과 다(多)가 걸림 없이 상대에 들어가지만, 그 본체가 동일하지 않으므로 일(一)과 다(多)라는 개별적 특징을 잃지 않는다. 하나와 많음이 상용한다는 말이다. 색과 공이 자재하게 작용함으로 볼 때는 하나가 일체에 들어가고 일체가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다. 서로 용납하여 두 물체가 함께 존재하지만 본체는 동일하지 않다. 또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유 제법의 자체는 모두 일체(一體)이므로 서로 원융무애자재(圓融無礙自在)함을 밝혔다. 예를 들면, 1전(錢)이 없으면 10전도 없고 10전이 없으면 1전이 없는 것과 같이, 하나가 없을 때는 일체가 없다는 뜻에서 일즉일체(一卽一切)이며, 일체가 없으면 하나도 없다는 뜻에서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고 한다. 현상의 본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一)과 일체(一切)가 서로 공(空)과 유(有)가 되어 양자가 하나인 관계로 서로 융합하고 포섭하지만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다. 삼매 속에서 부처는 우주의 모든 다른 부처님을 포함해서 그 어떤 중생의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 이 거울이 저 거울을 받아들임으로써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되는 것이다. 물과 파도가 서로 부서지면서 합하게 되는 것과 같이 모든 법상이 상즉하여 무애 자재한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