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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본문

한자1
[禪雲寺]
한자2
뜻(설명)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에 있는 사찰로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707년(숙종 33)에 쓰인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兜率山禪雲寺創修勝蹟記)」에는 전자의 설을 취하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 밤에 좌변굴(左邊窟: 진흥굴, 도솔암 밑에 있음)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한 것이 이 절의 시초라고 하였다. 이 창건 설화는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는 사실에 따라 형성되었겠지만, 당시에 이 지역이 신라 땅에 속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또 검단의 창건설을 보면 위덕왕 24년은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지 2년 뒤에 해당한다. 그런데 검단과 해구(海口)에 있는 검단리(檢旦里)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옛날에 검단선사가 바닷가의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쳤기에 해안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설은 모두 설화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그 후 검단이 중건한 것으로 기록한다. 그 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였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 년 동안 극유(克乳)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극유는 1472년에 이 절에 이르러 뜰에 9층석탑만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발원하였다. 그는 이듬해 2월 제자 종념(終念)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德源君)이 쓴 원문(願文)을 얻어 중창을 시작하였다. 그해 여름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의 재목 1,000여 그루를 세 척의 배에 싣고 왔으며, 1473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웠다. 그리하여 1474년에는 2층의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짓고,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先王仙駕)를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이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동상실(東上室)·금당(金堂)·능인전(能仁殿) 등을 짓고, 또한 영산회(靈山會) 등 오십삼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10여 년에 걸친 극유의 중창불사로 인하여 선암사는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건물이 189채나 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1609년에 이르는 2년 동안 승려 수십 명이 선방(禪房) 한두 개소를 먼저 지은 뒤 몇 년 동안에 법당 3칸을 지었다. 1613년(광해군 5) 봄에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에게 중창을 부탁하자 일관은 원준(元俊)과 더불어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았다. 그리고 어실을 빙자하여 고창 문수리에서 재목을 얻어 먼저 보전(寶殿) 5칸을 세운 다음 상·하 누각과 동·서 양실(兩室)을 1619년에 건립하였다. 이후 1707년(숙종 33)에 이르기까지 일관·원준 등이 서로 계승하여 건물을 세우고 화상을 조성하는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다. 1698년에 김우항(金宇杭)이 쓴 「선운사중신기(禪雲寺重新記)」에는 중수에 참여하고 당시 선운사에 살고 있던 대중 260여 명을 기록하고 있다. 1707년 현익(玄益)이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를 지었다. 1839년(헌종 5) 비로 인해 법당 오른쪽 2칸이 무너졌다. 이에 찬성(贊誠)·의홍(義弘)·성찬(誠贊) 등이 법당과 향운전(香雲殿)을 수리하고 정문(正門)의 기와를 갈았는데, 1840년 가을에 중수를 마쳤다. 이때의 중수 내역을 기정진(奇正鎭)이 「무장현선운사대법당사적기(茂長縣禪雲寺大法堂事蹟記)」에 기록하여 남겼다. 1965년 팔상전을 중수하였고, 1998년 성보박물관을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