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본문
한자1
[性徹]
한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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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설명)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며 산청 단성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여 신체검사에서 탈락하였다. 이후 요양차 대원사에 드나들었다.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가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다고 한다. 이 무렵 대원사 탑전에서 화두 참구하며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이르렀다. 최범술(효당, 1904~1979)의 권유로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1936년 25세의 나이로 범어사 조실 동산(東山, 1890~1965)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하였다. 1937년 3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고, 범어사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나면서 용성을 시봉하였다. 용성은 그 무렵 어떤 승려를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손자인 성철에게는 “성철수좌, 성철스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설정하고 청담·우봉·성수·도우·법전 등과 더불어 불조(佛祖)의 정법을 발양하며 교단 정화의 기초를 다짐하였다. 1955년 교단 정화 이후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10여 년간 정진에 몰두하다가 1966년에 해인사로 복귀한 후 다음 해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다. 백일법문을 시작으로 중생 제도의 길을 보였으며, 1981년 조계종의 7대 종정, 1991년 8대 종정에 재추대되었다. 1993년 11월 해인사에서 세수 82세, 법랍 58세로 입적하였다. 열반송(涅槃頌)으로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生平欺誑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