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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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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그동안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다룬 연구는 대체적으로 정치사, 경제사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기존 연구와 달리 식민지 시기의 양상을 다양한 측면, 특히 사람들의 일상생활 영역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흐름들이 등장하고 있다.
동국대학교와 일본 붓쿄대학의 학술교류협정에 바탕을 두고 2008년 4월부터 2011년 3월까지 3년간 진행된 제2회 공동연구의 주제 또한 최근 일상사 연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았다. 공동연구의 결과물로 출간된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묻다』(동국대학교출판부 刊)는 책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식민지 지배하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일상이란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식민지주의가 사람들의 일상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그리고 그 식민지주의에 대해 조선 사람들은 일상의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살피고 있다.
한국 학자 2인, 일본 학자 2인의 논문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일 학자들이 여섯 차례에 걸쳐 한일 양국을 오가며 벌인 현장 답사와 연구 보고 및 토론회, 학술 심포지엄 등의 연구 성과물로, 일본에서는 이미 같은 내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철호의 <일제의 한국 병탄에 대한 한국민의 인식과 대응>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강제적 체결 전후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한국 병합’에 대한 한국 민중의 대응과 인식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 병합’ 전후는 물론 일제강점기 전 시기에 걸쳐 비밀결사를 결성한 독립운동가, 학교 교사와 학생, 기독교 신자 등 지식인뿐 아니라 시민들과 ‘기생’, 아이들까지 여러 형태로 ‘한국 병합’에 반감을 가지고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식민지 지배 당국의 통제와 감시에 의해 공포와 체념으로 ‘침묵 상태’에 빠진 이들도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하라다 게이치의 <한국 병합 전후 도시 형성과 민중>은 제국 일본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에 살고 있던 조선과 일본 민중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전라북도 항구도시 군산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병합 이전 군산에는 세관과 경찰 등 한국 정부의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황제의 ‘칙령 개항’지였는데 병합 후에는 그곳을 중심으로 군산항 관청가가 형성되고, 그곳을 둘러싸듯이 일본인 거리, 그 연장선상에 조선인 거리가 형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일본풍이 확대되고 조선적인 모습이 축소되어 간 식민지 도시 형성 과정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덧붙여 중국인 상인의 활동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중·일이 혼재된 도시였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된 점도 주목해야 할 연구 성과이다.
김신재의 <일제 강점기 ‘고도 경주’의 형성과 고적 관광>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고적 관광지로 개발된 ‘고도 경주’에 주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고분을 발굴하고 유물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등 근대적 유물 보존 시스템을 가지고 ‘고도 경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적 관광지화를 계기로 수학여행차 방문하는 학교가 늘어나는 등 ‘고도 경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에 이용당하는 결과가 되었지만, 한편으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높이는 이율배반적 측면도 존재했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오타 오사무의 <중일전쟁 시기 대구 조선인 여학생의 학교생활>은 1937년 대구의 조선인 여학생이 쓴 『여학생일기』를 해독하면서 일상생활에서의 식민지 지배 양상을 그려내고 있다. 1937년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중일전쟁의 본격화를 계기로 ‘황국 여자’ 교육이 전면화되었는데, 그 와중에 학교 측과 조선인 여학생 사이의 마찰과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조선인 여학생에게 ‘국어(일본어)’로 일기를 쓰게 한 사례 등을 들며, 이러한 사실들은 식민지 조선인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한 것으로 그 자체에 식민지성이 내포되어 있었음도 지적하고 있다.
이 책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묻다』의 출간은 식민지 지배의 가해자인 일본 측과 피해자인 한국 측 역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의 틈 또는 차이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기를 통해 한일 간 역사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이 도출되길 기대해 본다.
책 속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국치일’을 계기로 독립에 대한 열의를 확산·고조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후 첫 번째 국치일을 맞이하여 서울의 상점은 마치 예약한 듯이 모두 철시하였고, 북악산에 큰 태극기를 달고 만세를 부르는 일이 일어났다. 또 국치일에 통분의 뜻을 표하지 않는 자에게 방화로써 벌하겠다거나 국치민욕을 잊지 말고 독립을 찾을 때까지 투쟁하자는 경고문이 살포되었다. 서울의 철시는 9월을 넘어서 지속되었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벌어진 시위운동도 10월까지 이어졌다. 부산에서는 국치일을 전후해서 총독 사이토 일행을 폭행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 65쪽, <일제의 한국 병탄에 대한 한국민의 인식과 대응>
군산 거류지는 일본만의 전관 거류지가 아니라 복수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각국 거류지’였기 때문에, 그것을 일본 영사관만이 관리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했고, 한성의 외국인 공사에 의한 협의 결과 1899년 12월 ‘군산 각국 거류지회 규칙’이 제정되어 그것에 근거하여 12월 29일 ‘군산 각국 거류지민회’가 설치되었다. 이때 거류지의 모든 주민은 65호 249명이었다. 다수는 일본인이며, 영사관 직원을 두고 있었던 것은 일본뿐이었기 때문에 ‘각국 거류지회’ 회장은 목포영사관 군산분관의 영사관領事官인 아사야마(淺山顯藏)가 취임했고, 대의원도 청국인이 기권했기 때문에 일본인만이 선출되었다.
- 83쪽, <한국 병합 전후 도시 형성과 민중>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고적을 조사·발굴하는 과정에서 가장 초점을 두었던 지역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 시대의 유적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및 낙랑군 시대의 유적이었다. 이들 지역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주목되던 곳이었다. 전자 지역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뿐만 아니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존재를 물질적으로 증명하기 위한것이었고, 후자 지역에는 한국의 역사가 타율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 157쪽, <일제강점기 ‘고도 경주’의 형성과 고적 관광>
K양 등은 일요일에도 등교하여 ‘위문품’을 만들었다. 10월 12일에는 “지난밤에는 조끼를 바느질했기 때문에 강독은 제1과까지밖에 못하고 정리도 충분히 안 되고 복습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무렵에는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평일 밤이나 일요일에도 ‘위문주머니’, ‘위문품’ 제작이 행해지고 있었다. ‘위문주머니’, ‘위문품’ 제작은 K양 등의 일과가 되었고, 그것들이 통상의 학습이나 수업보다 우선시되었다. 그 외에 K양 등은 ‘부상병들의 위문’ 음악회(10. 6.)나 전사한 ‘황군 병사’의 추도식(9. 3), ‘사이다(才田) 항공병의 부민장府民葬’(11. 4), ‘순국 용사를 기리는 의식’(12. 3)에도 참가했다.
- 265쪽, <중일전쟁 시기 대구 조선인 여학생의 학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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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발간에 앞서
발간에 즈음하여
서문
1. 일제의 한국 병탄에 대한 한국민의 인식과 대응__한철호
2. 한국 병합 전후 도시 형성과 민중__하라다 게이치
3. 일제강점기 ‘고도 경주’의 형성과 고적 관광__김신재
4. 중일전쟁 시기 대구 조선인 여학생의 학교생활__오타 오사무
Abstract
필자 및 역자 소개 -
저자소개
한철호韓哲昊
1959년 서울 출생
한림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취득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한국 근대사·한일 관계사 전공
• 주요 저술
『친미개화파연구』, 국학자료원, 1998.
『한국근대 주일한국공사의 파견과 활동』, 푸른역사, 2009.
『한국근대 개화파와 통치기구 연구』, 선인, 2009.
하라다 게이치(原田敬一)
1948년 일본 오카야마(岡山) 시 출생
오사카(大阪)대학교 문학연구과 박사학위 취득
붓쿄(佛敎)대학 사학부 교